윤희에게

2019년에는 영화를 잘 보지는 않았습니다만, 누군가 저에게 올해의 영화를 골라보라 한다면 머뭇거리지 않고 <윤희에게> 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.
개봉 전, 트위터에서 보랏빛이 감도는 푸른 설원에 두 인물만 덩그러니 서 있는 포스터를 본 순간부터 극장에서 볼 날만 기다렸습니다. 두근대는 마음을 간직한 채 조조 상영으로 보고 나온 그 날은 참 멍했습니다. 영화가 주는 여운이 말 그대로 엄청나서, 그 파도에 휩쓸릴 수 밖에 없었어요.
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는 듯 합니다. 오래된 사랑과 추억, 정체성과 사회의 거리, 부모로서의 역할과 오롯한 나 사이에서의 무게, 가족으로부터 받는 억압 등등을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. 이런 주제들이 지닌 묵직함을 생각하기에 참 좋은 영화입니다. 소중한 영화에요. 그럼에도 저에게 있어서 <윤희에게> 는 일단 '재미있는 작품' 입니다.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이나 연출이 아주 매끄러워서 보는 입장으로서는 편했습니다. 지나치게 극적이지도, 또 그렇다고 마냥 현실적이지만은 않은 게 퍽 마음에 듭니다.
그래도 배우들의 연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네요. 작품에는 유독 김희애 배우가 울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. 오타루로 향하기 전에는 마냥 건조하기만 하던 얼굴이, 추억에 한 발 더 다가갈수록 감정을 드러내는 것 같았습니다. 오히려 나카무라 유코 배우의 감정변화가 적은 것이 의외였습니다. 사회에 부딪치며 단단해진 결과일까요? 아, 나카무라 유코 배우가 나온 장면 중에서는 '커밍아웃' 부분이 가장 좋았어요. 쥰의 말을 통해 나오는 대사들이 시사하는 바가 참 가슴 아프기도 하면서, 은연 중에 드러내는 것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. 그리고 그 장면의 나카무라 유코 배우의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. 검은색 앙고라 니트...
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좋기만한 작품입니다. 좋지 않은 장면이 없어요. 새봄이와 경수의 투닥거리는 장면들도 귀엽습니다. 새봄이가 잘 웃지 않고 틱틱대는 것들도 좋아요. 쉽지만은 않은 인물이라 마음에 듭니다. 그리고 경수가 키링남처럼 나오는 것도...
그렇지만 콕 집어서 가장 좋은 장면을 선정하자면, 저는 오프닝 시퀀스요. 흔들리는 기차 창밖으로 성난 겨울 바다가 나오고 그 위로 창틀에 맞추어 윤희에게 라는 필기체의 타이틀이 나오지요. 저는 지금까지 두 번을 보았는데, 음악이 나오고 그 부분에서 자꾸만 울컥했어요. 이유는 모르겠네요. 그렇게 슬퍼진 마음으로 영화를 마주하니 모든 장면에 잔잔한 슬픔이 깔려 있었어요.
극장에서 더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되려나 모르겠어요. 꼭 여성서사 퀴어영화 라는 타이틀이 붙지 않아도, 충분히 훌륭하고 재미있는 영화라 생각합니다. 많은 분들이 <윤희에게> 를 꼭 봐주셨으면 좋겠어요.